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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지

017. 아침까지

오랜만에 인식씨 촬영을 했다.
요즘 인식씨는 저녁 8시에 출근해서 마감까지 일한다. 마감은 원래 5시인데, 손님이 없으면 4시가 되기도 하고, 여하튼 아침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까지 일하는 것.

예전에 마감하는 걸 찍은 적은 있었는데, 퇴근 장면을 찍은 적은 없어서 이번엔 마감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인식씨는 이제 8월 10일이면 일을 그만두기 때문에 막판 스파트!라고 생각하고 심신을 다스렸다. 흐흐.
인식씨는 4월보다 머리가 많이 길었고, 더 많이 웃는다. 장난은 여전하고, 카메라 의식하는 것도 여전하고, 담배는 늘었다고 하고, 여자친구와는 헤어졌단다. '남자가!'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인식씨는 싸나이가 되고 싶어 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다.

저녁 10시 즈음부터 4시까지 술집에 있으면서 엉겁결에 서빙도 하고, 그러면서 술집에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내가 알바생인 줄 아는 그들에게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고, 남 얘기 듣기 좋아하는 나는 또 열심히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다.(나에겐 꽤나 흥미로운 직업군!) 최근의 주식 동향, 빠삐놈, 연예인들의 행사 비용, '꼴린다'라는 말의 근원, 부시와 이명박, 둥지냉면의 맛 등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중에 한 테이블에서는 연애와 섹스, 원나잇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고, 그들은 목소리가 너무 커서 거의 모든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남자 둘, 여자 둘로 이루어진 그 테이블은 한 쪽에 앉은 남녀가 연애하다 헤어진 커플이고 나머지 두 남녀는 그들이 연애할 때부터 알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남자가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하려다가 안 하고 돌아왔다'인데, 남자 두 명은 '남자의 본능으로서 웬만큼 사랑하지 않으면 하려다가 안 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고, 헤어진 여성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주장했으며, 나머지 한 명의 여성은 여자들도 참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넷은 서로 막 싸웠고, 잇힝한 얼굴과 달리 썅욕을 막 내뱉으시던 여성 분은 어쨌든 이 새끼랑 끝낸 건 잘한일이라며 술자리를 정리했다. 뭐 이렇게 쓸 만한 얘기는 아니었던 거 같지만, 그 사람들의 말투, 몸짓 뭐 그런 것들이 굉장히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촬영하고 싶었다. 소심해서 촬영은 못했지만, 그냥 기록.

요즘에는 촬영을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막 든다. 그런데 그거에 비해서 촬영을 많이 하지도 않고 이런 저런 시도들도 해 보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게을러서이기도 하다. 촬영은 구성이나 편집과 달리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시공간의 제약이 존재한다. 내 게으름은 그 시공간의 제약을 잘 뛰어넘지 못한다. 또 다큐멘터리 촬영은 그 순간에 집중력과 순발력, 관찰력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게 점점 자신없어지는 거 같다. 오히려 촬영을 디지게 못할 때는 잘 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내가 못하는 걸 인지한 후에는 점점 오그라드는 느낌.
나는 인식씨가 좋다. 그 사람이 보이는 전부의 모습이 좋은 건 아닌데, 인식씨가 살아온 삶에서 가지게 된 싸나이에 대한 로망 사이사이에 그가 가진 섬세함이나 배려가 나타나는 순간들이 좋다. 사람들은 그런 틈을 내 보일 때가 매력적인가보다. 그런데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가 얼마나 그 틈들을 잡아냈을지가 고민인 거다. 예전에 같이 다니면서 촬영을 한 선배의 말에 따르면, 나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어느 순간에 개입을 하고 어느 순간에 화각에서 빠지고, 그런 걸 잘 파악 못하는 거다. 그래서 눈치 없는 애로 낙인 찍혔는데, 실제 살아가면서 눈치를 많이 보는 거에 비해서 확실히 촬영의 감이 떨어지기는 한 거 같다.
오늘도 인식씨 집에 따라가면서 그가 좋아진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걸 잡아내진 못했을 거다. 어쩌면 익숙하고 관습적인 샷들로 가득한 테잎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잘 관찰하고 좋은 순간, 혹은 나쁜 순간을 잡아야 하는데, 액정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인물은 사라져 버리고 구도나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같은 생각만 남는 것도 한 이유.

반이다에서 일을 하면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때로 나를 한 없이 추락시키거나, 내가 이 공간에서 필요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유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과 함께 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갖게 해 준다. 뒤쳐지지 않으려면 나도 자라야 한다. 쑥쑥.

쑥쑥 자라고 싶지만 요즘 수면이 부족해 퇴행하고 있는 모리씨의 오랜만의 촬영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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