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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지

021. 모래네 시장

나뷔와 촬영을 갔다. 나는 태풍의 눈(샘터분식 작업실)에서 출발했고 나비는 반씨(반이다 사무실)에서 출발해 홍대 입구역 마을버스 승강장에서 만났다. 괄호 안에 부연설명을 열심히 넣고 있다는 것은, 태풍의 눈과 반씨를 모르는 사람들도 의식하면서 쓰고 있다는 말이죠. ㅎ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한 모래네 시장. 건물들은 낮고 시장은 넓었다. 전형적인 시장의 모습이었지만, 하나 같이 폐업과 정리, 세일 이라는 글자를 벽에 붙여놓고 있었다. 그 큰 시장과 주변이 재개발 되면서 모두 철거 된단다. 이미 공사를 시작한 구역도 있다고 한다.

날씨는 좋았다. 시장과 동네도 예뻤다. 그래서 촬영도 재미있었다. 시장골목을 찍기도 하고 몸빼바지를 찍기도 하고, 벽에 잔뜩 붙어있는 이삿짐 센터의 전단도 찍었다. 멀쩡한 이 곳을 다 무너뜨리고 아파트를 짓는다니, 찍을수록 기가 찼다. 나비에게 꼭 단편으로 만들라고 이야기했다. 모래네 시장은 나비가 20년 넘게 산 동네이다. 나비는 기획서를 쓸 생각이라고 했다. (하삼!)

골목으로 들어갔다. 빈집과 사람들이 이사하면서 버리고 간 의자와 가구들을 찍고 있는데 옆 대문 열리고 어떤 아저씨가 등장했다. 편한 혹은 허름한 옷차림.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우리가 촬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들은 대충 이렇다.

"철거 때문에 찍고 있냐? 어디서 나왔느냐?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그럼 RTV 에서 나왔느냐? (RTV에서 일했었다고 하자) RTV에서 찍을 것 같더라. 나는 자주 본다. 공중파는 안 본다. 거짓말이라서. RTV에는 소신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바른말해서 자주 본다."

그렇다. 놀랍게도 그 아저씨는 RTV 애청자였다.

"철거 하는 놈들 다 미친 놈들이다. 이 멀쩡한 동네를 왜 부수냐? 좋은 이층집들도 얼마나 많은데? 미친놈들. 구청에 가서 미쳤다고 말했었다."

아저씨는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다고 하셨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재개발 되는 이유는 땅을 가진 사람들이 다 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저씨과 같은 세입자들이나 영세 상인들, 특히 시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들은 재개발에 찬성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아저씨 앞에서 가야된다고 말할 타이밍을 찾느라 한참을 쭈뼛거리며 있었다. 마침내 아저씨가 숨 돌리는 틈을 타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골목을 나와서 아파트를 짓고 있는 공사 현장을 찍고 거리에 있는 문 닫은 상점을 찍었다. 상점의 유리와 셔터에는 '투쟁, 조합 반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글씨가 뻘건 라카로 적혀있었다. 두 집 건너 한 집씩 문을 닫았고, 나머지 상점들도 이전 안내를 알리는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나비가 촬영하는 동안 길가에 앉아서 그 동네를 보고 있는데, 아득해졌다.

정말 이렇게 멀쩡한 집들을 다 부수겠다는 말이지? 저 집은 지은 지 2년도 안 되어 보이는데. 저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가는 걸까? 아깝다. 진짜 아깝다. 이렇게 예쁜 골목들이 사라진다는게. 말도 안 된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한 둘이어야지.

그 때, 검은색 승용차가 우리 앞에 와서 멈춰섰다. 뭘 촬영하냐고, 촬영 허가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그냥 대충 얼버무려서 보냈는데, 잠시 후 어떤 남자가 다가온다. 뭘 촬영하고 있냐고? 촬영하면 안 된다고. 재개발을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막으려는 조합측의 관리였다. 우리는 방송국도 아니고 그냥 찍는거다 부터 시작해서 카메라만 들고 있다고 해서 문제 삼을 수 있냐까지. 막무가내인 그 남자와 한참 실랑이 하다가 우리의 신분증을 요구하길래 먼저 신분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어이없어 하면서 아까 차를 타고 왔던 그 남자를 불러왔다. 그 남자는 명함을 주면서 비슷한 말들을 했다. 싸운다고 될 것 같지도 않고, 더 이야기가 길어지면 촬영한 테이프를 뺏어갈까해서 더이상 촬영 안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나비와 나 둘 다 신분증이 없었다.

여튼 오래만에 거리에서 촬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뿌듯한 하루였다. 다만 문제는 촬영한 것이 개청춘과 많은 연관은 없다는 것.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재개발과 관련된 몇 컷이었는데 말이지.

엄청난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하루
덩치 큰 남자들과 싸울 때는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을 확인한 하루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낀 하루
우리들의 삶은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이 전망되는 하루

빅뱅의 하루하루를 듣고 싶군ㅎㅎㅎ 적고 나니 길다. 어제 액트 편집위원과 한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도 적고, 민희 출근 시간에 못 일어나서 촬영 못한 이야기도 적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지면 안 되니까. 긴 것은 코끼리아저씨의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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