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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2008] 돈의 시대, 청춘들의 고군분투


씨네 21 기사. 그냥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똥파리] 어떤 작품인지 보고 싶네. 극영화에서 지금의 20대 혹은 청춘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보자요?

 

서울독립영화제2008 상영작 중심으로 정리한 올해 독립영화 경향

12월11일부터 19일까지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독립영화제가 열린다. 각종 군소 영화제의 증가로 이젠 새로운 독립영화, 감독들을 발굴하기보다 한해의 독립영화를 정리하는 성격이 강해졌지만 서울독립영화제2008은 올해도 총 51편(단편 40편, 장편 11편)의 본선 경쟁작을 준비했다. 프리미어 작품은 단 다섯편. 하지만 이는 서독제의 규모가 위축됐다기보다 근래 10년간 독립영화의 주변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가 서울독립영화제2008 상영작을 중심으로 2008년의 독립영화 경향을 정리했으며, 올해 새롭게 신설된 섹션 ‘촛불영상-재밌거나, 열받거나’와 특별전 ‘감각의 독립, Sex-표현의 자유를 누려라’를 소개한다. 더불어 올해 서울독립영화제2008에서 처음 공개되는 5편의 작품 소개도 모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독립영화들을 보면서 내렸던 결론이 있다. 문제는 항간의 평가처럼 이들이 자기 내면의 문제에만 골몰하며 정치적인 문제를 등한시한다는 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를 쉽게 소재로 취하면서도 충분히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경향은 자신의 불행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정치성이 생기며 타자의 문제를 주제로 내세우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윤리가 보장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영화들을 반복해서 목격하면서 나는 세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퇴행하고 있으니, 이 영화들이 그 흐름을 역행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거라는 암울한 예측도 했었다.

하지만 2008년 서울독립영화제를 앞두고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그것이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들의 현실 인식에서 갑작스러운 도약의 지점이 발견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전과 비교해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 자기 연민을 가득 품은 채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뿜다가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는 대신, 적어도 자기 안에서 성찰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한 인상이 있다. 물론 이 인상이 작품의 질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아니며, (이런 표현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지만) 정치적인 올바름과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무언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느낌이 있다. 2008년 현재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글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영화들의 대답이다(2008년에 개봉되었거나 올해 서독제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대상으로 글의 맥락에 적절한 영화만을 선택했다. 따라서 개별 작품에 대한 지지나 비판의 자리가 아님을 밝힌다).

돈 없는 꿈이 불가능한 세대 그려

독립영화 속 무기력한 청춘군상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이런 영화들에서 청춘의 방황은 그 무렵의 누구라도 겪을 법한 일이지, 그 중심에 돈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설사 그게 숨겨진 진실이라도 영화들은 돈보다 고결한 고민거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최근의 영화들에서 청춘의 경제적 무력감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의 노골적인 핵이다. 그 무력감의 정체가 수상하다. 예컨대 <여기보다 어딘가에>(이승영)의 수연은 독립적인 삶은 원해도 독립적인 경제력에는 관심이 없는데, 꿈을 찾아 떠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가출기는 결국 따져보면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며, 돈 없는 꿈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세대의 초상이다.

<기차를 세워주세요>(한지혜)에 등장하는 네명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삶이 “돈도 일도 없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멈추지 않는 ‘기차’에 탄 것과 다름없다고 읊조린다. 이상한 건 이들이 국적과 성정체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명백히 다른 계급적 조건을 가진 이질적인 집단의 구성원임에도 마치 공통된 운명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은 ‘생존권 쟁취’와 ‘프리 허그’가 써진 담벼락 밑에 앉아 유희하며 경제적 무력감이라는 신종 심급으로 연대한다. <탑골당 만행사건>(김수영)은 좀더 유쾌하고 씁쓸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백수 청년이 마주 앉아 천박하게 떠드는 십대 소녀들에게 훈계를 하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는 이른바 ‘샌드위치 세대’의 비굴한 자화상이며 경제적인 무능력과 현실 인식의 불일치에서 일어날 법한 희비극이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에서 무노동은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도, 반감도 아니며 엄밀히 말해 계급적인 성격을 띤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타자를 착취하고 자신을 착취하다

<똥파리>

하지만 <똥파리>(양익준)에 이르면 더이상 웃고 지나칠 만한 상황은 없다. 영화는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린 문제임을 직설적으로 파고든다. 여기서 부모의 경제적 무능력을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한 방법은 착취다. 타자를 착취하고 나아가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사랑은 단백질>을 만든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아들 닭을 튀겨 ‘내 다리 치킨’ 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닭의 눈물을 두고 “피지배층이 스스로를 착취하고 괴롭히며 살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넥스트 플러스> 54호). <똥파리>에서 그 구조는 개별 인간의 죽음으로도 단절되지 않으며 폭력과 착취의 연쇄를 끊고 다시 시작하는 지점도 실은 폭력과 착취의 뿌리를 나누고 있다.

그건 <고기도시>(정경록)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도축장과 다름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우두인(牛頭人)으로, 그런 다음 고기로 전락하고 그 고기를 먹는 인간이 같은 과정을 거쳐 누군가의 고기가 되는 악순환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분명 사유가 더 진척된 건 <똥파리>류의 작품들이지만, 이들이 <기차를 세워주세요>와 같은 영화들보다 더 희망적이고 덜 근심스럽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비슷한 소재들을 다룬 과거의 작품들에 비해 이 두 부류가 더 나아갔다고 믿고 싶은 건 이들이 자신의 불행을 상투성에 근거해 그저 전시하는 데에서 만족하는 대신, 자기냉소든 자기모멸이든 자기비판이든 어찌됐든 자신을 경유하여 세상과 타자를 말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때 영화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의 형상화인 것 같다. 자신의 위태로운 삶을 그 삶의 터전 안에서 생각한다는 건데, 흥미롭게도 삶의 이야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데 비해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초현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터전 자체가 그렇다. 그리고 인물들이 매혹되거나 충돌하고, 부유하거나 소외되는 이 기이한 도시의 풍경은 자본의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증식의 산물이며 그걸 민감하게 포착하는 건 사회 주변부의 시선들이다.

<청계천의 개>(김경묵)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현실과 꿈을 방랑하며 말하는 개를 만난다는 설정만큼 가상적인 건 도시 한가운데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인공폭포의 풍경이다. <125 전승철>(박정범)에서 탈북자 승철이 임대아파트 주변에서 주운 낡은 장롱을 집으로 끌고 와서 마치 관에 들어가듯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할 때 암흑이 된 화면은 그가 대낮에 본 기괴한 건축물과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풍경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 섬뜩한 풍경 이면에 작동하는 욕망의 구조를 보여주는 영화가 <낙타는 말했다>(조규장)다. 여기서 고향은 출옥한 남자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 인간의 기형적 욕망을 추동하며 확장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황량한 벌판 뒤에 세워진 새 아파트처럼 한편에서는 자본의 환상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 환상이 배출한 자본의 쓰레기가 공존한다. <허수아비들의 땅>(노경태)은 그런 환상이 결국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을 을씨년스러운 들판 여기저기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미래의 약속을 담보로 무수한 욕망을 사들이던 자본은 끝끝내 그 약속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유보된 땅은 결국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황폐한 땅이며, 이 영화가 보여주듯이 유령 같은 이미지로만 우리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도시 풍경

물론 이 피폐한 현실에 대한 현미경적인 인식을 넘어서 그 시간에 틈을 내려는 영화들도 있다.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박지연)과 <철탑, 2008년 2월 25일 박현상씨>(변해원)는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차이에도 유사한 선택에 이르는데, 그것은 차라리 목숨을 걸고 공중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에서 여자의 집은 철거작업이 갑자기 중단된 뒤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그녀는 어차피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는 땅으로 내려오는 대신, 허공에서 균형을 잡고 사는 길을 택한다.

<철탑…>에서 두달째 고공농성을 벌이는 GM대우의 해고 노동자 박현상씨는 교통 관제탑의 비좁은 공간에 앉아 휴대폰에서 나오는 뉴스와 매끼 땅에서 배달된 도시락으로 연명하며 철탑 아래 땅의 시간과 싸운다. 상상이든 현실적 저항이든 두 영화는 최근 본 독립영화 중에서 가장 고독하다.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영화가 <워낭소리>(이충렬)다. 이 다큐멘터리는 태도와 가치, 관계를 버리라고 종용하는 자본의 시간 속에서 늙은 농부와 그가 30년 넘게 부려온 늙은 소가 일구어낸 삶의 주름을 담는다. 가장 잊기 힘든 건, 죽기 직전 노인을 바라보는 소의 눈동자와 그걸 응시하는 노인의 서글픈 눈빛이 오가는 마지막 순간이다. 거기서 두 존재는 쓸쓸하게 한탄을 나누는 것만 같다. 지금 이 땅에서 자기만의 시간성을 끝끝내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외롭고 힘겨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