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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춘> 난 이렇게 봤어!

[개청춘 리뷰] '우리'의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인가

모깃불 님의 리뷰입니다. 감사감사 :)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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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 수정본. 좀 일이 있어서 수정해 보았다.

개청춘 : ‘우리’의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인가


(인용은 모두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확신할 수 없다.)

'요즘 드는 생각이, 그때 왜 나에게 자아실현은 취미생활로도 가능하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물론 말해줬어도 그때는 몰랐겠지만…' –만화 작가에서 ‘현실적인’ 방송작가로 희망 직업을 바꾼 것에 대해, 승희


추 웠고, 영등포는 멀었지만 정말 큰 마음을 먹고 다녀왔다. 고교졸업 후 입사 7년 차, 백화점 인사과라는 괜찮은 직장에 다니지만, 회사에서는 더는 고졸사원을 뽑지 않기에 7년째 막내인 민희.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가, 그나마 현실과 타협한 방송작가를 시작했지만 '시다'로 밖에 일하지 못하는 승희. 그리고 스무 살, 입대를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인식. 조금 없이 사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영상집단 <반이다>의 셋. 그들의 이야기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승희는 촛불집회에도 나가고, 나름대로 청년회라는 집단에서 사회활동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 그녀는 몇 달 바짝 일하면 입봉시켜 준다는 프로덕션으로 옮겼다. 민희는 자신의 꿈과 직장생활, 그리고 가정 내의 문제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야간대학을 다니더니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이 되었다. 인식은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군대에 갔다. <반이다>는 꽤 성공적인-우리만의 리그일지언정- 평가를 받으며, 다른 20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좋은 다큐였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꿈도 현실도 없는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우리들을 위한, 우리들에 의한 이야기였다.


하 지만, 나는 인식이 마음에 걸린다. '솔직히 청년실업이란 말도 웃기다고 생각해요. 사지 멀쩡하고 대학까지 나와서. 저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일하는데…' 인식의 첫 대사였다. 술집에서 서빙을 하다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첫마디를 떼었다. 술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인식과 <반이다>의 찰영자는 <조난 프리타>를 함께 보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인식은 카메라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걸으면서 소감을 이야기한다. ‘(…) 아 뭐야... 쟤는 처음이랑 끝이 똑같잖아요. (...) 짜증나.' (...) '다른 사람들은 자기 할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다큐를 찍으면서 제가 좀 끌려다니는 것 같아요. (…) 그런 거 다 생각하고 찍으셨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사람들이 나 불쌍하게 보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는 원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해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반이다>와 연락이 끊긴 채 촬영을 중단했고, 다큐의 후반에 다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때 그 (조난프리타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도 들고… (걔는 일본 대표고 나는) 대한민국 대표 패배자. (웃음). 아 빨리 좀 먹어요(촬영자에게 분식을 권함)'


<반이 다>는 아마도 인식과 우리의 이런 문제가 너 혼자의 일이 아니라는 것, 함께 고민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식이 분명히 상처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자각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이 자각이었을까, 좌절이었을까. 촬영자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도, 착실하게 직장 경력을 쌓은 것도, 어떤 특별한 기술이나 직업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 미숙련 임금 노동자 혹은, 노동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알바'에 대해서. 임시적인 돈벌이나, 용돈을 위한 파트타임이 아닌, '알바'가 본업인 '알바'들에 대해서. 물론 인식의 특수한 상황-군 입대 전 남자애들의 전형적인 부유浮游-도 크게 작용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루하루 일하고 있는데, 더럽고 짜증나지만 꾹꾹 참고 가리지 않고 일하는데, 배우고 싶은 일을 배울 수도 없는 그 상황에 대해서. 장사를 시작해 볼 돈을 모을 수도 없는 그 조건에 대해서. 하루, 이틀 다니다 그만두는, '책임감 없는 어린 애들'로 치부되는 알바에 대해서. 그들의 선택할 권리와 자아실현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 해야 한다. 자신의 말처럼 정말 '어려서부터 힘들게' 일해온,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던 인식은 하루 가고 그만둔 옷가게 알바에 대해서 말한다. '진짜 이건 아니에요. 뭘 배우는 것도 아니고…'

사 람들이 불쌍하게 보면 어떡하느냐고 자조와 혼잣말을 섞어서 조금 촬영자들을 원망하던 그의 말이 계속 기억난다. 그래 너 불쌍한 거 맞다. 나도 그렇고. <반이다>역시 서로의 불쌍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인식에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조건에서, 다른 나이이지만,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머지 5명과 너무나 이질적이었으니까.


인식은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고, 나는 지난 1년 동안 소득세 대상 금액이 6자리 수 밖에 되지 않지만, 아무래도 나는 인식 보다 사회적, 문화적 자본을 갖고 있다. 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것은 잠시 잊고 생각해 보자. 20대 사이에도, 88만 원 세대 안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대기업 다니는 '엄친아'들이 아니라 취직 못한 백수들 사이에도 선택의 폭은 분명히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혹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위해, 또는 그런 착각에 빠져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늘을 낭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드렛일 뿐인 것은 분명히 다르다. 대학 졸업자, 20대들의 눈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직업-아니 정확히는 구매력을 갖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인 것을 인정하고, 자격증과 수험서에 몰두하는 그들을 반쯤은 책망하고 반쯤은 연민하지만, 분명히 그들과도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 해야 한다.

일자리를 나누자, 일자리를 만들자, '블루 오션'을 공략해 창업을 하자… 좋다 치자. 토익과 학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허위의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젊음이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정책과 논의들은 고등교육 또는 그에 준하는 교육수준을 갖춘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들 만큼, 우리는 이미 일 하고 있는 청년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비정규직'조차도 안 되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그 존재에 대해서. '워킹푸어'라는 단어로 분석하는 것이나, ‘알바노조’를 만들자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

만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인식은 '청년실업'을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고, <반이다>는 그런 그에게 <조난 프리타>를 보여줬다. 반이다는 인식과 전혀 대화하지 못했고, 인식은 그런 접근을 ‘끌려간다’고 느꼈다. 이런 현상이 진행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우리가 40살쯤 되면 얼마나 멀어지게 될 것 같은가. 이 차이가 어떻게 변화할 것 같은가.


나 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열 아홉 살 까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인식과 민희의 중간 즈음으로 20대를 살아가는 중학교 동창이 있다. 친구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그곳의 친구들과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평범하게 '노는' 생활을 했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적당히 왔다갔다했다. 하지만, 한 동네에서, 한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한 동네에 위치한 두 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즐겁게 놀았다. 오락실에서 만난 친구의 친구들과도 얼굴을 익히고, 일탈에 대한 부담감과 태연한 척하려는 치기를 숨긴 채 술집에서의 모임에 초대받아 아주 어색하게 앉아있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그때부터 어떤 균열은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친구는 같은 중학교를 나온 인문계 고교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18세,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했고, 만나지는 못해도 자주 전화를 하고 메일을 보내며 연락을 유지했다. 그리고 일 년 뒤, 대학을 다녔고, 친구는 일을 했다. 그리고 점점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다. 거리가 멀어진 문제도 있지만, 우린 점점 할 말이 없어져 갔다. 똑같이 멀어진, 인문계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다른, 무엇이 그 사이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불편했고, 몇 번은 그 불편함에 대해 함께 토로하기도 했지만, 넘어설 수가 없었다.

삶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그 친구보다 더 낫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난 스물 이후 7년째 밥을 축내고, 대학에 천오백을 갖다 바치고, 지금은 백수로 지낸다. 친구는 빵집 아르바이트부터 하루 이틀 나가고 그만둔 서빙, 회사 사무직, 설계사무소를 거치더니 건축에 관심을 갖고 전문학사를 취득했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민희도 그렇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대학뿐인가? 정말로?). 일하며 학업을 계속해서 대학원이란 곳도 가 보고 싶다고, 친구는 몇 달 전 술 취한 밤에 전화를 걸어 머쓱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린 별로 할 말이 없다. 난 그게 너무 불편했다. 그 불편한 감정이 불편해서 더욱 연락은 줄어들었다.

내 감정은 뭘까? 그냥 시간은 흐르고, 불안정한 20대에, 거리도 멀어졌고, 생활도 달라졌고, 서로의 삶에 바빠지며 친한 친구들이 멀어지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 불편한 감정은 도대체 뭘까? 다른 친구들에게 느끼는 그리움이나 아쉬움이 다가 아닌,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월함인가? 우월함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짜증과, 우월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느끼는 미안함 같은 것인가? 왜 미안해야 하지? 미안함은 정당한 감정일까? 내가 잘났으니까 미안한 건가? 도대체 뭘까 이 불편함은.


이 불편함은 그 친구와 나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그 정체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우리의 삶이 점차 갈리고 있다. 갈려 나가고 소외되고 있다. ‘우리’ 아이의 교육 문제, ‘우리’ 20대들의 취업문제, 88만원 세대들의 이야기… 중등교육에 대한 논의는 인문계와 실업계 교육에서 어느새 특목고와 인문계의 문제로 옮겨갔다. 실업계 교육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의 실업 문제는 고등교육의 비용과 산업의 인력수급 불균형에 초점이 맞추어질 뿐, 전체 20대, 전체 실업자의 이야기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 갈라진 경계 안에서 조차, 우리는 또 갈라지고, ‘연대’해야 한다고 피 터지게 외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어떤 대책이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린 좀 더 만나야 하고 이야기 해야 한다. 난 인식이 끌려다닌다는 생각 없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을까 주저함 없이, 언젠가 휴가를 나와 이 다큐를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관계는 서로에 대해 무지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이 전부다. '생각 없이 노는 애들', '공부만 하는 재수 없는 애들', '부모 잘 만나서 대학 나오고 노는 세상물정 모르고 나약한 애들',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애들', ‘패배자’, ‘얌체‘…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 우리의 시선이 존재한다. 결국에 나도, <반이다>도 그나마 여유 있는 아이들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그저 대학 나온 아이들의 자의식 배설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게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우리가- 인식과 내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