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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춘> 난 이렇게 봤어!

[개청춘 리뷰]개같은 청춘? 열어보자 청춘! 개청춘!

티스토리 블로거 hendrix 님의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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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이야기가 빵 터졌을 때 주어졌던 메시지 하나는 이제 좀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변희재는 80년대생을 60년대 386 운동권들이 막아서 이 모양 이꼴이고 사실 알고보면 그건 다 진중권 같은 좌빨 지식인들이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걸 반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진입하는 90년대 생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생의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김용민이 '20대 개새끼론' 혹은 "20대 니들은 뭘 해봐야 안 된다"라고 말할 때에 대한 완벽한 반증이 된다. 촛불 세대가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왔는데 얘들이 특별히 다르진 않다. 나중에 한 번 쓸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이들이야 말로 대치동 엄마의 Management에 의해서 완벽하게 통제된 아이들이다. 얘들은 <88만원 세대>도 논술 버전으로 읽은 아이들이다. 촛불소녀를 막은 건 전경이라기 보다는 학원과 엄마의 결합이다. 이건 386아닌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집행 중이다.

<88만원 세대> 이야기는 불완전 노동구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20대는 '80년대 생'이 아니라 사회에 진입하는 첫 세대를 이야기하는 거다. 따라서 변희재나 김용민이 하는 말은 다른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하지만 구태여 내가 힘을 뺄 필요는 없겠다. 그들의 동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다 읽혔다(이건 한윤형이 가장 정확하게 짚었다)

어쨌거나 그 불완전 노동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서 사는 '우리', 20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우리는 할 수 있나?

<개청춘>을 보면 된다. 20살에 상고 졸업하고 백화점 정규직으로 다니는 민희의 이야기와 술집에서 일하지만 항상 의상과 관련된 디자인을 하고 싶고 장사를 하고 싶은 인식. 아직 막내 작가라 펜 잡고 글 한 번 제대로 못 써봤지만 여전히 서브 작가를 거쳐서 메인 방송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승희.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반이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에는 지금 20대가 처한 모든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다 있다. 커피 타는 '기본 업부'를 못 한다고 매일 상사에게 혼나는 민희. 사지 멀쩡한데 왜 대학씩이나 나와서 그러고 사냐면서, 푸념하냐면서 퍼붓던 인식은 <조난프리타>를 보면서 너무 우울하다고, 결국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걸 보여주는 거 아니냐 한다. 방송계에서 '전문직 프리랜서'의 꿈을 꾼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승희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 지에 대해 안다. 그리고 반이다가 영화를 찍는다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말들을 들을 지에 대해서 명백하게 안다.

하지만 그래도 민희도, 인식도, 승희도, 그리고 카메라를 들이댄 반이다도 간다. 다만 그 길들에 차이는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는 멈춰서 쉬고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다만 갈 뿐이다. 그들이 가는 걸음이 경쾌해 보이면서도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면 눈물이 난다. 그래도 명랑하다. 유쾌하다. 정신 못차리던 나도 곧 나를 찾아낸다.

영화는 굉장히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상'과 카메라를 쥔 '제작자-감독'이 있는 게 아니다. 카메라의 시선은 늘 대상을 총으로 쏘듯이 타자화 시키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배치시키곤 한다. 하지만 <개청춘>은 찍히는 대상과 찍는 제작자가 섞여 버린다. 그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서로 공감하고 부대끼고 말 그대로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 버린다. 지쳐버린 민희가 반이다를 찾아온다. 이제 배우와 감독의 경계는 없어져 버렸다. 사실 찍고 싶은 이야기도 우리의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니까 말이다.

영화는 쉽게 다 잘 될거야라고 약치지 않는다. 약을 치고 뻥을 치는 영화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늘상 들어와서 이게 영화감이 되냐고 싶은 우리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다 나오는 거다. 사소하게 다투는 모습이라고 피해갈 순 없는 거다. 이런게 영화가 된다는 거. 그리고 그것들을 함께 보면서 또 다음 우리의 작업, 나의 작업을 구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開 청춘이란다. 열어보자 청춘! 소리 질러봐야 하지 않을까. 꼰대들이 정해놓은 규격에 맞춰사는 거 너무 재미 없잖아. 우리 이야기를 서로 공감하면서 들어주고 또 우리의 말들을 모아서 뭐라도 벌려보고 될 수 있도록 함께 해보기. 그러면서 바뀌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의 공간을 여는 건데. 우리의 공간은 아무도 안 열어줄 거다. 우리가 열어야 한다. '당사자 운동'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시키는 대로 해서는 모든 게 다 쉽지 않고 그냥 가만 있으면 권력을 장악한 꼰대들은 놓을 계획이 없다. 유인촌 장관이 한예종 영상원 이론학과 학생들에게 대하는 방식의 대화법이 그들이 우리를 생각하는 방식의 표현태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공간을 열어야 우리 말을 할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말을 해야 우리 공간이 열리지 않나.

대화를 거부하는 상대에게 맞춰가면서 '스펙'으로 또 '토익 점수'로 말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게 '개같은 청춘' 아닐까. 승희가 "내가 나를 안 좋아해"라고 말했을 때 억장이 무너져서 눈물이 났다. 혼자 한번 코를 들이마셨다. 그래도 다시 발랄하게 뛰어놀 수 있는 거. 그나마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우울증 걸려 다 죽을 순 없잖아.